“…우리 마을을 설립한 사람은 달성서씨가 여수 화양면에서 살면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풍랑을 만나 우리 마을로 피난을 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
그 후 대구서씨 뒤를 이어 전주이씨, 김해김씨,
…등 여러 성을 가지신 분들이 우리 마을을 일구어 나가고 있다.…”
바람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일상에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모든 스쳐가는 바람을 잡을 수 없듯, 드러나지 않은 채 삶의 도처에서 조용히 머무르는 감각들. 이 일상의 침묵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순천 별량면에 위치한 고장마을은 오래전 한 어부가 풍랑을 만나 우연히 닿아 터를 이루면서 시작된 곳이다. 이후 여러 성씨가 스치고 머물며 덧입힌 시간들이 층을 이루어 왔다. 화려한 상징과 특별한 지형은 없지만, 대나무 숲과 집들, 갯벌과 바람이 서로 얽혀 마을을 이어온다.
오래된 생활의 장면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지금, 마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더욱 절실해졌다. 그러나 갯벌의 진흙을 그러모아 유리병에 담는다고 그것을 바다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물때를 기억하는 몸의 감각,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스며드는 냄새, 반복되는 노동의 몸짓과 갯벌의 기척. — 서로를 연결하는 줄거리 — 타인의 고장, 그 일상은 손안에 그러쥘 수 없이, 그저 흘러가는 결들로 흐릿하게 어림할 뿐이다.
연고 없는 타인의 일상에 잠시나마 닿을 방법은 없을까.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들리지 않는 바람을 듣는 일이다. 현재까지 마을을 엮어내 온 유래 설화에 주목한다. 그로부터 머물다 떠난 존재들의 흔적과 잠재된 기억들, 그 시간의 결을 오늘과 내일을 잇는 문단과 공백 사이의 조용한 힘으로 조심스레 더듬어 보는 일뿐이다.
«타인의 고장»은 사라져 가는 마을의 초상을 복제하고 재현하기보다, 낯선
장소와 삶에 다가가는 관계를 열어가고자 기획되었다. 타인의 삶과 그 터를
‘이해했다’고 선언하는 방식보다, 타자를 타자로 두는 태도. 해석하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고, 그저 그들의 시간을 지탱하는 침묵에 잠시 머무르고자
한다.
고장마을을 하나의 고정된 장소로 규정하기보다,
소리·바람·갯벌·사물·흔적이 매 순간 흘러가며 겹겹이 쌓여 온
결로 받아들인다. 외부인으로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조각들을
따라가며, 침묵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를 듣는 행위는 곧 이야기하는 행위가 된다. 우리가 만난 이야기는 마을 바깥으로 옮아가고, 새로운 화자에게로 나아간다. 마을의 일상이 침묵하더라도. 잠시 도래했다 떠나는 철새, 바다의 숨통을 여는 갯벌의 존재들, 그곳을 머물다 지나는 많은 이들의 존재, 장소의 안과 밖을 엮어내며 경계를 지우는 이들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란다.
1막. 불어오다
달빛이 머무는 여름밤, 고장마을에 바람이 불어왔다. 낮의 열기를 머금은 공기는 여전히 무겁고 축축했으나, 스쳐 간 바람은 놀랍도록 선선했다. 그 순간 허름한 초가집 안에서 한 아이가 첫울음을 터뜨렸다. 뜨겁게 터져 나온 울음은 바람과 부딪혀 지붕 위로 흘러올랐다.
바람은 갈대밭을 스치며 신선한 숨결을 퍼뜨렸다. 바다는 달빛 아래 물결을 일렁이며 화답했다. 달빛 속에서 그물을 손 보던 늙은 어부는 바람에 섞여든 울음을 듣고 중얼거렸다.
“또 한 줄기 바람이 이 땅을 찾았구먼.”
2막. 만나다
소년은 짠내를 맡으며 바다에서 자라났다. 여름이면 갯벌에서 조개를 줍고, 가을이면 만선을 꿈꾸며 낡은 배 위에서 밤을 지새웠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뺨을 훑고 지나가면, 어머니가 쥐여준 손난로가 소년의 손바닥을 데웠다.
바다는 소년의 놀이터이자 스승이었다. 흰 수염이 가득한 노인은 옛 서씨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을의 뿌리를 일깨워주었고, 손이 거친 어부 아저씨는 풍랑을 만났던 밤을 이야기하며 거친 파도를 견디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3막. 깃들다
소년은 청년이 되어 고장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떠돌던 바람 같던 걸음은 이제 돌담에 뿌리 내린 들풀처럼 숨을 고르게 되었다. 그는 새벽마다 바다로 나가 그물을 던졌고, 저녁이면 만선의 꿈을 품은 채 잠들었다.
함께 자라던 이들이 하나둘 떠나도 그는 남았다. 그들과 건넌 파도, 함께 손질한 그물, 불빛을 나눠 가진 새벽의 기억들이 뿌리처럼 깊어져 그의 삶을 붙들었다.
4막. 불어넣다
완연한 바다 사내가 된 그는 더 이상 바람에 흔들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고요한 마을에 새 풍랑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었다.
날이 궂은 날에도, 만선의 꿈이 꺾인 날에도 그는 바다로 나섰다. 풍랑이 치는 날이면 오히려 크게 웃으며 배를 몰았다. 그의 활기는 꾸준한 해풍이 되어 마을 사람들의 가슴마다 작은 파도를 일렁이게 했다.
그의 숨결은 지친 이들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불어넣었고, 바닷가에서 터져 나온 노랫소리는 저녁 바람에 실려 창호지를 흔들며 집집마다 스며들었다.
5막. 다시 떠나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 사내는 마을의 터줏대감이 되어 있었다. 숱한 풍랑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그의 삶은 이제 마지막 숨결이 되어 바람으로 흩어지려 했다. 그 찰나, 골목 너머 초가집에서 또 한 아이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 울음은 바람에 실려 대밭을 흔들고, 바다는 은빛 물결로 화답했다. 사내는 희미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래전 자신이 처음 이 마을을 흔들던 바람이었듯, 이제 또 다른 바람이 이 땅에 깃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미소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몸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숨결은 바람이 되어 마을을 감쌌다. 떠나도 머물며, 흩어져도 이어져, 고장마을엔 다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00:00 - 00:14]
(풀벌레 우는 소리, 바람 소리와 함께 영상이 시작된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연둣빛 논 한가운데 대나무 장대가 우뚝 서 있다. 논 중간에
꽂혀있는 장대 끝에 묶인 주황색 깃발이 바람을 이기지 못할 듯 펄럭이며
'파닥파닥' 소리를 낸다. 저 멀리 낮은 능선의 산들과 전신주가
늘어져있다.)
[00:15 - 00:39]
(이야기) "옛날 옛적 여수 화양면에 서씨라는 이가 살았디... 달성을
본관으로 둔 서씨는 잔뼈가 굵고 능한 어부였지라. 이날도 어김없이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바다로 나갔는디..."
[00:40 - 01:02]
"저, 달성 서씨들이, 화양면에서 인자 뱃놀이를 하면서 어장을 하다가
이렇게 저렇게 사는데...”
(이야기) “헌디 배가 바다로 나갈수록 바람이 영 심상찮더니, 이대로 가다간 배를 바다로 끌고 갈 판인지라. 아이고 이를 어찌해야 쓸까잉....”
“태풍이 어느 날 갑작시리 이렇게 오는 거여. 태풍이 와가지고 마산 쪽으로 몰려온 거여, 밀려오는 거여. 그래가지고 여기 와서 서씨들이 자리를 잡고..."
[01:03 - 01:23]
"예전에는 태풍 오면은 막 저기 다 넘어가고, 여기 반문학꼬(마을 앞
학교)까지 왔응께 바닷물이. 저 밑에 둑이 없어갖고, 맞아 맞아. 요
앞에도 막... 동네 앞에도... 요 곁에 고랑 논에까지 바닷물이 다
들어왔어."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벼가 바람에 일렁이는 논, 그 너머로 갯벌과 이어지는 울타리를 비추는 화면)
[01:24 - 01:35]
"거기가 옛날에 여자가 죽어갖고... 그 묻어놓은 거기, 거기 그
자리여.”
(이야기) “이에 목숨 건진 서씨는 자기를 살려준 이 땅을 운명이라 여기고 그곳에 터를 잡기로 했디."
[01:36 - 02:15]
(고장마을 전경. 옹기종기 모인 집들과 기와지붕.)
"이 고장이라는 데가 원래 서씨들이 자리를 잡은 데요, 그리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땡땡 중이... '나 한 가지 말을 가르쳐줄게. 당신들
앞으로 부귀영화 살기가 편코 모든 것이 다 편합니다. 제 말을
들으세요.' 해서 '해봐라' 하니까.”
“요 앞에 버스 다니는 우에 길 있지? 그 길을 막으라 그랬어. 교회 있는 쪽 그쪽에는 말하자면 쥐고, 고양이가 인자 저쪽에... 쥐가 건너와서 고양이가 탁 잡아먹어버리니까."
[02:16 - 02:34]
(펼쳐진 회색빛 갯벌. 물이 빠진 자리에는 갯벌을 드나드는 작은 배 한
척과 물길이 구불구불 나 있다.)
"맨날 바닥(바다/갯벌)에서 살았으니까 바닥 이야기지 뭐. 맛도 잡고, 꼬막도 잡고, 기(게)도 잡고, 짱어도 잡고..." (질문자: "예전에는 기 어찌 잡으셨어요?") "손으로! 손으로 주서서(주워서)."
[02:35 - 03:26]
(이야기) “서씨네 곳간을 따서 고장이라는 마을이 생겨 불었거든. 그
뿐이랴. 전주 이씨, 김해 김씨, 순천 김씨...”
“전주에서, 광양으로 해가지고 순천에 여기까지 오는거여. 여 와서 자리잡고 사는데.”
...
(인접한 마을과 갯벌의 구역을 나누기 시작)
"...얼마나 우리들 말뚝 박고 댕긴지 알아요? 우리들도! 그 띨 적에? 우리가 다 박았어. 나가(내가) 얼마나 박았는지 알아? 다 널타고 뭣 타고 나가 많이 박았어. 지금은 다 없어졌지. 지금 다 없어져버렸제."
“누가 들어왔냐면, 광산 김씨, 그 분들이 들어온 거여. 그러고나서 김해 김씨, 이씨, 뭐 뭐...”
(갯벌 위로 하얀 백로 한 마리가 우아하게 날갯짓하며 지나간다. 이어서 여러 성씨가 모여 살게 된 마을의 내력을 읊조리며 영상이 천천히 마무리된다.)
옛날 옛적, 여수 화양면에 서씨라는 이가 살았디. 달성을 본관으로 둔 서씨는, 잔뼈가 굵고 능한 어부였지라. 그날도 어김없이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바다로 나갔는디, 바닷바람이 어째 좀 거세게 불더라꼬. 그래도 서씨는 애써 모른 척 혀부렀어. 배 곪는 것보단 바닷바람에 맞서는 게 낫것다 싶었던 거여. 헌디 배가 바다로 나갈수록 바람이 영 심상찮더니 이대로 가다간 배를 바다로 끌고 갈 판이지 뭐여.
“아이고, 이 일을 어째야 쓰까잉….”
서씨는 그제야 발을 동동 구르먼서 바다를 노려봤어. 파도는 점점 높아져부렀고, 당장이라도 쬐깐한 배를 꿀꺽 삼켜뿔 판이었지. 그때, 서씨 머릿속에 퍼뜩 어매가 해준 말이 떠올라부렀어.
“서씨야, 너는 쥐여. 쥐.”
어매 말을 들은 어린 서씨는 얼굴이 벌게지며 말했디.
“아니, 어느 누가 지 아들더러 쥐라 한다요?”
어매는 허허 웃으면서 달아오른 서씨 머릴 슬그머니 쓰다듬어줬지.
“다 뜻이 있응게로 그러지.”
그땐 그 말이 영 이해가 안 갔지만, 지금 바다 위에서 허우적대는 이 상황에선 기묘하게 마음에 와 닿더라. 서씨는 쥐가 가진 재주를 떠올렸디. 일단 쥐는 똑똑했지라. 숨겨둔 곡식 귀신같이 찾아내는 거 보믄 말이디. 또 민첩하기도 참 민첩해서 고양이도 따라잡기 힘드니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였지라. 마지막으로 쥐는 어디다 던져놔도 억세게 살아붙는 놈 아니더냐꼬.
“그래. 나는 쥐여. 쥐!”
그렇게 되뇌며, 서씨는 배를 돌려부렀어. 그리고 오랜 뱃사람의 감각으로, 서서히 육지를 향해 나아갔디.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질 무렵, 서씨의 눈앞에 땅이 보이기 시작했디야.
“살았다! 살았어잉!”
서씨는 어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땅에 닿았고, 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
“어매 말이 맞았네잉! 어매 말이 맞았어!”
그리 목숨 건진 서씨는, 자기를 살려준 그 땅을 운명이라 여기고 그곳에 터를 잡기로 했디. 몇 해가 흘러, 자리를 잡은 서씨 곳간엔 곡식이 수북이 쌓였어. 지나가던 나그네 하나가 그 곳간을 보고 물었디.
“혼자서 다 먹지도 못할 곡식을 뭣하러 이리 쌓아뒀소잉?”
서씨는 허허 웃으면서 말했지라.
“곳간에 곡식이 넉넉해야 쥐도 잘 사는 법 아니것소잉.”
나그네는 그 말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머리를 갸웃거리대. 그라니까 서씨가 또 말했지라.
“무르익은 곡식이 쌓여가믄 인연도 영글어불 것이다. 그 말이여. 때가 되면 다시 여기를 들러보소.”
나그네는 그 말을 허풍처럼 흘려듣고 발걸음을 옮겼지. 하지만 몇 해 뒤, 다시 그 길을 지나던 나그네는 놀랄 수밖에 없었디. 서씨의 곳간을 따서 ‘고장(庫莊)’이라는 마을이 생겨 불었거든. 그 뿐이랴. 전주 이씨, 김해 김씨, 순천 김씨, 광산 김씨, 김녕 박씨, 함안 조씨, 강릉 유씨, 밀양 박씨, 진주 강씨까지 새로운 인연들이 하나둘 마을에 모여들어 터를 잡고 살고 있었다 이거여.
“허허, 서씨 자네 말대로… 이 마을에 인연들이 잔뜩 영글어불었구먼잉.”
그렇게 나그네는 웃으며 고장마을을 지나쳤디야.
2025.11.29 ~ 2025.12.03
장천 노랑극장(장천 6길 8)
참여: 소리골남도 / 호이요 /이안 / 전여울 / 전도희
기획: 이십이 / 김산
후원: 전라남도 / (재)전남문화재단
전시 «타인의 고장--옮아가기»는 ‘순천 별량면 마산리 고장마을’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기반으로, 타인의 삶과 그 감각의 밀도에 잠시 귀기울이는 자리다.